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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나만의 철학 (일명 開東哲學)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평소에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아주 특별한 상황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도 인생의 일부분일 뿐이고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천국과 같은 사후세계란 것이 있을까? 사후세계는 영원하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나’ 라는 자아의 구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대부분이 기억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기억력이 붕어처럼 3초에 불과하다면 집이 어디인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고 언어나 문화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어도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인간의 뇌는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기억은 뉴론 간의 무수한 연결 접점인 시냅스에 저장된다. 뇌의 처리 속도는 30Hz 정도로 빠른 3GHz CPU 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지만 천 억 개의 뇌세포 가운데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140억 개의 뇌세포가 서로 얽혀있어 생각이나 창의력 등 훨씬 고도의 작업을 할 수 있다. 이처럼 뇌는 대단한 병렬형 컴퓨터로 마치 무수한 CPU가 서로 병렬로 연결돼 동시에 처리가 되는 것과 같다. 예를들어 빵을 본다면 빵이라는 인식뿐 아니라 먹는 것이고 이러저러한 종류의 빵이 있고 향기는 어떻고 하는 것들이 동시에 연상되며 이 가운데 그 상황에 필요한 정보만을 선택하게 된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뇌는 병렬처리가 되기 때문에 무수한 뇌파가 존재한다. 주된 일을 하면서도 여러가지 잡생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많은 뇌파 중에서 주도권을 쥔 것이 우리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다중인격이나 정신장애 현상은 이 뇌파의 주도권 문제가 정상이 아닐 때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생각이나 의식은 뇌가 있어야 가능하다. 생각이나 판단은 모두 과거의 학습이나 기억을 필요로 하고 뇌파는 뉴런을 뒤져가며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야 가능하다. 고통이나 기쁨, 슬픔을 느끼는 것도 뇌가 있어야 가능하다. 뇌는 이화학적인 컴퓨터라 할 수 있다. 전기적인 인자 뿐 아니라 화학적인 인자에 의해서도 조절된다. (감정이나 성향은 뇌가 아니라 심장에서 담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장과 뇌는 단지 혈관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별도의 연결선이 있다.)

생각이란 것을 들여다 보자. 한국사람은 한국어로 생각한다. 영국사람은 영어로 생각한다. 생각하는 데에는 시간이란 것이 걸린다. 우리의 의식이 어떤 것을 느끼고 판단하는 데에는 결정적으로 시간이란 인자가 필요하다. 더구나 언어는 학습에 의한 것이다. 애초에 태어날 때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언어를 학습하게 되고 언어가 있으므로서 비로서 논리가 생겨 사회적인 행복과 불행의 개념이 생긴다. 여기서 물질적인 뇌가 없이는 생각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유물론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물은 담은 그릇이 있다고 할 때 물은 그릇에 종속된다고 할 수 있는가? 물과 그릇은 별개이다. 물을 담으려면 그릇이 필요할 뿐이다.
어느것이나 극단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 단맛이 너무 강하면 쓴맛이 날뿐이다.
중풍이나 교통사고 때문에 뇌가 손상된 경우 생각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고 어린아이 처럼 변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결국 뇌가 모두 손상된 죽음의 상태에서는 생각이란 것도 없어지게 됨을 알 수 있다.

생각만이 아니라 행동도 뇌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단순히 양말을 신는 행동도 어린아이는 한참동안 손을 요리죠리 움직여가며 힘겹게 신지만 어른은 집중하지 않고도 아무 생각없이 신을 수가 있다. 그 차이는 단지 어린아이가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양말을 신기 위해 손의 잔 근육을 조절해가며 손가락을 제 위치로 움직이는 것은 요즘의 로봇 기술로도 힘든 고도의 작업이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뇌에 이런 행동을 위한 신호선이 아직 연결되지 않아 집중해서 세밀하게 하나하나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반면 어른은 이미 이런 행동에 필요한 신호선이 뇌에 일종의 매크로 처럼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행동이 일어나게 된다. 오른손 잡이가 왼손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 어색하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 역시 그러한 신호선이 왼손을 위해서는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손으로 행동을 할 때는 아무런 생각없이도 행동이 일어나지만 왼손으로 할 때는 계속해서 손의 잔근육을 생각해서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른이 새로운 운동을 배우면 처음에는 몸이 잘 따라주지 않지만 계속해서 연습하면 뇌에 그 행도에 필요한 새로운 신경망이 생겨서 나중에는 잘하게 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두발로 걷는 다는 것도 엄청 어려운 일이다. 아직까지도 온전히 두발로 걷는 로봇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제한된 조건하에서 걷는게 가능한 로봇 만이 존재 할 뿐이다. 아기가 두발로 걷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넘어져야 했던가?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걷고 젓가락질 하는 행동은 모두 뇌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죽음이란 태어남의 역과정이다. 태초부터 존재하던 자연으로부터 얻은 육체를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려 주는 것이다. 자라면서 얻게됐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과정이다. 자아의식, 지식, 언어, 기억들... 결국 생각이란 것도 '나' 라는 자아도 사라져 버린다.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돌아가신 조상을 만나기를 기대하는가? 조상에 대한 기억은 죽은 뇌에 존재하는 것이다. 설령 천국이 있다 해도 볼 수 없으며 들을 수 없고 기쁨도 고통도 느낄 수 없다. 자아라는 개념도 존재할 수가 없다. 의식 자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후세계를 경험했다는 이 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밝은 빛을 따라 갔다는 등의 증언들은? 그것은 뇌에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 것을 너무 생생하다는 느낌 만으로 현실인 것처럼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착각이다. 어느 인상파 화가의 색채가 화려한 것은 뇌질환 때문에 실제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개인으로 보면 인생이란 시작과 끝만이 있고 죽음이란 더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종착역이다.
이 틀 안에 갇혀서 생과 사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 내세, 천국, 윤회와 같은 상황에 한정된 끼워 맞추기식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관점을 먼 곳으로 옮겨 시야를 넓게 본다면 보다 진실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아주 넓고 길게 자연 혹은 생명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생과 사는 계속해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한 생명체를 만들어서 점차 병들고 없어지고 고장나고 낡아가는 생명체를 대신하도록 하여 전체 생명체를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는 순환과정이다. 왜 처음부터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는가? 그것은 만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종이 있다면 결국 수 천 수 만년 후에는 멸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고 적에 그런 종이 있었다 해도 오늘날에는 볼 수 없는 이유이며 환경에 적합한 종 만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결과이다. 죽지않는 생명은 영원할 수 없으며, 태어나고 죽음이 있어야만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
생과 사의 근원적인 비밀이 바로 여기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내 몸은 혼자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물리적으로 연결된 끈이 보이지 않는 것일 뿐 내 형상과 사고는 혼자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수십 억 년 진화의 연속된 기록이며 산물이고 인간은 생명 그 자체이며 동시에 운반자이다. 마치 개울을 건너기 위한 징검다리와 같이 가까이서 보면 그저 가치없는 돌멩이 하나로만 보일 뿐이지만 멀리서 보면 그제서야 역할과 기능이 드러나 서로 떨어져 있는것 같으나 연결돼 있는 것이고 중간에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의 의미를 잃어 버리게 된다. 돌멩이 하나 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에서는 수 천년 동안 아무리 고민을 해도 결국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진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편견없이 바라볼 때만 보이게 된다.

죽으면 무(無)가 된다는 것이 허망한가?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단순하고 간결하다.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화려한 진실은 없다. 그저 허황된 인간의 욕심만이 있을 뿐.
천국을 찾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욕심 때문에 돈을 갇다 바치고, 욕심 때문에 진실을 놓지고 이용당하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이승의 삶에 만족할 뿐이다.
때문에 무위(無爲), 무지(無智), 무욕(無慾) 을 추구하고, 학문과 같이 무궁한 것에 욕심을 부리며, 몸을 꾸준히 단련하는 것이 좋다.
무지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먼저 배워야 버릴 수가 있다.
죽음이란 무의미한 단절이 아니라 자손을 두거나 철학이나 예술 작품과 같은 방법으로 형체가 바뀌어 남게 된다.
현재 살고있는 환경이나 문화는 모두 선조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영원하고 싶은 허망을 버리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2005-05-13 [조회: 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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